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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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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부터 2014년까지 블로그 활동을 돌아보며 - 내 블로그 되돌아보기 내 블로그를 어떤 이름으로 부르고 어떤 카테고리에 분류할 수 있을지 정체성을 되돌아 볼 기회를 가져보세요. 블로그 처음 시작은 다음 블로그였다. 처음 포스트한 것은 김명호 교수 공판 사항 정리한 글이었다. 재판 내용이 궁금해서 지방법원에 직접 가서 재판 내용을 많은 분들이 알 수 있도록 글을 올렸다.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그 당시 시간 여유가 많았기 때문이다. 2007년.건강상의 문제로 회사를 그만두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는데 그 당시 뉴스에 크게 보도된 사건이 바로 김명호 교수의 석궁 사건이었다. 재판 결과에 불만을 갖고 판사를 직접 찾아갔던 일이 뉴스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 내용을 종합해서 정리해보았다. 내가 내린 결론은 국가 권력이 한 명의 교수를 부당하게..
김명호 교수 X판 발언의 실상 김명호교수 4차공판 X판에 대해 말하자면.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2단독 - 아 리 솔 - 금일 오후 2시부터 4시 15분까지 공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지금 언론을 보니 한 언론에서 감치에 대한 의견을 썼네요. 공판을 지켜보며 제 옆에 YH 기자분께서 앉아 있으셨고 다른곳에 K방송국에서 오신 분이 있었습니다. 객관적인 단순 사실만 기사로 나와서 오해할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서 제가 기사를 작성합니다. ↑객관적 사실의 기사만 보고 쓴 100자 의견(`석궁테러' 김명호씨 법정모독 7일 감치(종합) 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가 되어야 하는 것 옳은 말입니다. 눈과 귀는 특정 사건에 대한 보편적 감정이 충분히 전달될 때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객관적 사실만 나열하면 바로 위와 같은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할..
석궁사건 김명호교수 3차공판 김명호교수 3차공판을 다녀와서.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2단독 서울동부지방법원 형사2단독(본관 2호법정) 공판기일 : 2007년 4월 2일 법 관 : 김용호 사 건 명 : 폭력행위등(집단. 흉기등상해) 등 오후 2시 부터 시작된 공판은 저녁 6시 가까이 진행되었습니다. 방청 인원은 약 70명정도였습니다. 1차 공판때 한겨례에서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2차 공판 부터 시들해져 감치2명 되었다는 기사만 YTN에서 썼고, 3차 공판은 아무 언론사도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라 씁쓸합니다. 제가 2차 공판부터 방청을 해서 전체적인 윤곽을 알기에 여러분께 공판내용을 쉽게 알려드리고자 이렇게 글을 올립니다. 일단 짧게 형사재판순서를 말씀드리자면 피고인이 자백하는 경우와 피고인이 범행을 부인하는 경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
2007년 3월 21일 동부지방법원 2차공판 2007년 3월 21일 동부지방법원 30명 정원인데 서서 지켜본 분들이 더 많았다. 역시 김명호 교수님은 강직한 분이셨다. 절대로 판사앞에서 주눅들지 않는 의연함, 그리고 검찰을 향한 형사법 오류 지적, 내가 검사의 표 정을 봤을 때 당황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시간은 2시 부터 4시 까지 이어졌는데, 길게 공판이 진행된 만큼 재미있는 사연들이 몇개 있다. 1. 증거물 현출 시 검찰과 변호인간에 확인을 하는 일이 있었는데 정작 중요한 판사에게 증거물 확 인을 해주지 않자, 정막을 깨고 들려오는 한마디 "저도 좀 보여 주시죠" 순간 방청객들의 폭소가 터졌다. 석궁을 시연하는 순간이었다. 2. 김명호 교수님이 공개 질의서를 보냈었는데, 이용훈 대법관이 묵살한 것에 대해 증인 신청을 했 다. 그것을 재판장이..